실적 악화·주가 급락 이중고 스팩 상장 8개사 파산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넘치는 유동성에 기업공개(IPO)에 나섰던 미국 기술 기업들이 실적과 주가 급락의 이중고에 처했다. 경기 침체로 성장주에 대한 투자 심리가 악화되는 가운데 유동성 한계 상황에 직면하면서 파산 위기로 내몰리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5일(현지시간) 금융정보업체 딜로직에 따르면 2020~2021년 상장한 150개 미국 기술 기업들의 주가가 평균 35% 하락한 것으로 집계됐다. 스팩(SPAC·기업인수목적회사) 투자와 밈 문화까지 가세해 최소 1억달러(약 1297억원)를 모집하며IPO투자 붐을 이끌었던 이들이다.
'넥스트 테슬라'로 주목받으며 주식시장에 화려하게 데뷔했던 리비안은 주가가 5분의 1토막나며 낙폭이 가장 컸다. 리비안은 2021년 11월10일 나스닥 시장에 상장한 지 닷새만에 시가총액이 1467억달러를 기록하며 글로벌 완성차 시총 3위 자리를 꿰찼다. 첫 전기 픽업트럭 출시로 미 전기차 시장의 개화를 이끌 것이라는 기대감에 상장 초기 주가는103.69달러에 달했지만 이날 종가 기준 16.92달러(하락률 83.68%)까지 떨어졌다.
팬데믹이 끝나면서 이어진 각국 정부의 고강도 긴축 정책과 인플레이션으로 유동성이 메마르자 투자자들이 성장주에서 안전자산으로 눈을 돌리면서 투자심리가 급격히 악화된 탓이다. 오로지 기대감에만 의존해 몸값이 급등했던 이들 기업은 주가가 실체 보다 부풀려져 있다는 거품 논란에 휩싸이면서 시장 눈높이는 더 낮아졌다.
리비안도 시장 예상치를 밑도는 실적을 내놓은 뒤 주가 낙폭을 더 키웠다. 리비안은 지난해 4분기 주당순손실이 1.87달러로 시장 예상치(1.94달러)를 크게 밑도는 부진한 실적을 내놨다. R J 스캐린지 리비안 최고경영자(CEO)는 당시 실적 발표 후 컨퍼런스콜에서 지난해 64억달러의 비용을 지출했다고 밝히며 유동성 위기 논란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64억달러는 리비안이 지난해 전체 벌어들인 매출액(16억5800만달러)의 4배에 달하는 규모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리비안을 비롯해 지난해 실적 보고를 마무리한 91개 기술 상장사 중 74개 기업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흑자 달성에 성공한 기업은 17개사에 불과했다는 얘기다.이들은 실적과 재무 상황이 악화되자IPO로 유입된 자금의 37% 이상을 2~3년새 소진했다. 자금난 심화로 일부 기업들은 고금리 부채를 끌어오거나 전환사채(CB) 발행으로 긴급 수혈에 나서고 있지만 이 마저도 여의치 않다.
적자를 기록한 이들 기업의 이익 전환에 대한 기대가 낮아지면서 투자 신중론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다.미국의 유명 벤처캐피탈 실리콘밸리뱅크(SVB)의 그레그 베커CEO는 "기술 회사로부터 대출 요청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지만, 일부 기업의 경우 어떤 자금 조달 방식도 여의치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사세를 키워야 할 시기에 비용 절감을 위해 고강도 구조조정에 돌입한 기업들도 적지 않다. 글로벌 기술 기업들의 정리해고 현황을 추적하는 레이오프스(Layoffs.fyi)에 따르면 팬데믹 기간 상장한 기술 기업 38개사는 이미 비용 절감을 위한 감원에 착수했다. 특히 스팩을 통해 상장한 기업들의 경우 유동성 위기가 한계에 내몰리면 파산에 이른 기업이 최소 8개사에 달하는 것으로 블룸버그 통신은 집계했다. 파산에 도달하는 시간도 점점 짧아지고 있다. 미 자율주행 관련 기술 기업인 쿼너지 시스템즈는IPO에서 파산 신청까지 10개월이 걸렸고, 3D 건축 프린팅 로봇 기업인 패스트 래디우스는 상장 후 9개월 만에 파산했다.
전문가들은IPO기업들의 주가 부진이 투자자들의 신뢰도를 낮추며 시장 침체가 길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사상 최악의 불황에 빠졌던IPO시장이 올해 부진 흐름을 깨고 회복세로 돌아서긴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다. 기술 기업을 주요 고객사로 두고 있는 글로벌 회계법인인 그랜트 손튼의 안드레아 슐츠 파트너는 "당분간IPO를 원하는 기업 숫자가 크게 줄어들 것"이라며 어느정도 업력을 쌓고 성숙한 뒤 기업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 때 상장을 고민하겠다는 기업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전했다.